<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책을 읽던 중 이런 문장이 나왔다.
대학이 마치 학생들의 손에 쥐어진 고무찰흙 같은 놀이터였다면 이곳은 창밖의 저 탑처럼 상징적이고 완고한 기관이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주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곳이 나의 틀이 될 것이다.
작가가 <뉴요커>라는 알아주는 기업에 취직하여 사회생활로 딱 발을 떼었을 때 느낀 점이다.
맞다. 대학은 고무찰흙이다.
좋은 대학, 흔히 말하는 명문 대학은 '많은 양의 흙'이다. 내 손에 쥐어질 수 있는 양이 많다는 뜻이자 선택권이 넓어진다는 의미이다.
나에게 주어지는 선택권으로 보나 외부에서 학교에 주어지는 기회로 보나 많은 양의 흙을 표방하는 많은 요소들이 있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저 멀리서 힘겹게 흙을 실어 오지 않아도 손쉽게 휘황찬란한 궁전도, 멋진 비행기도 만들 수 있다.
물론 궁전과 비행기를 짓는 데 드는 어마어마한 노력은 흙이 많다는 이유로 상쇄되지 않는다.
다만, 쌓여 있는 흙을 보며 내가 그릴 수 있는 그림의 크기를 마음껏 꿈꿀 수 있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만' 성공한다는 구닥다리 관념에 동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래도 내 옆에 놓인, 손만 뻗으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기회들이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사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직장은 나의 틀이다.
하지만, '대기업'이 곧 큰 틀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흙은 '나'에 의해 모양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틀은 '남'에 의해 '나'의 모양이 만들어진다.
대기업은 나의 틀을 (어쩌면 나의 가능성보다 훨씬) 작게 만들기도 있다.
왜냐하면 항상 'next step'을 준비하는 그들의 도화지는 미지의 미래를 준비해야 하기에 너무나도 자유분방하다.
뾰족한 부분, 뭉툭한 부분, 길다란 부분이 공존한다.
이런 도화지를 효과적으로 채우려면 '나'라는 틀은 아주 정교해야 하고 정교하기 위해선 작아야 한다.
내가 놓일 흰 도화지가 클 뿐, 나의 틀은 너무나도 작다는 생각?
사실 오늘 취준생 친구와 만나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친구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기업에 지원하기 위해 영어자격시험을 공부하고 있었다.
나도 곧 취업준비를 앞둔 입장으로 5월 이후로는 대기업 위주로 지원을 시작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출발선을 앞에서 몸을 풀고 있는데 뛰기 시작한 친구를 보니 '우리의 결승선은 어떤 곳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내가 (얕게나마) 경험해본 대기업은,
업무의 레인지가 작고
자체적으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담당자를 찾는데 열 통이 넘는 전화를 돌려야 하는 곳이었다.
통계의 함정에 빠진 걸수도, 대기업이 아닌 기업들의 현실을 모르기에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확실한 건 다음 달 카드값을 위해 간신히 출근하여 점심시간, 퇴근시간만 고대하다 집에 오는 삶은 절대로 살고 싶지 않다.
내적 동기부여에 의해 몸이 움직여지는, 매일은 아니더라도 일주일에 3번은 퇴근하고 살아있음을 느끼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 (0) | 2024.04.19 |
---|---|
교수님과 커피 챗 (4) | 2024.03.15 |
인생 제 3막의 직업은 '요가'로 하고 싶습니다. (0) | 2024.02.28 |
혼자서도 행복하기③ - 혼자 코인 노래방에 가다 (0) | 2024.02.26 |
혼자서도 행복하기② - 무기력 극복, 밖으로 나가 도서관 가기 (0) | 2024.02.22 |